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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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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Scott Fitzgerald 지음

F. Scott Fitzgerald의 퍼블릭 도메인에 속하는 고전 · NovelSpell의 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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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Scott Fitzgerald

제1장

내가 지금보다 어리고 상처받기 쉬웠던 시절, 아버지가 해준 충고가 있다. 나는 그 말을 여태껏 마음속으로 되새겨왔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면,”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여건을 누리며 살아온 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늘 말을 아끼면서도 남달리 뜻이 잘 통하는 사이였으므로 나는 그 말에 훨씬 많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들었다. 그 탓에 나는 웬만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다. 이 버릇 덕분에 온갖 기묘한 성품의 사람들이 내게 속을 털어놓았지만, 남을 지루하게 만드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시달린 적도 적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정상적인 사람에게 이런 성향이 보이면 재빨리 알아채고 달라붙는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거칠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내들의 은밀한 슬픔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정치꾼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 고백은 대부분 내가 청한 것이 아니었다—내밀한 고백이 저만치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음을 틀림없이 알리는 기색이 보이면, 나는 잠든 척하거나 다른 일에 몰두한 척하거나 쌀쌀하게 실없는 태도를 꾸미곤 했다. 젊은 남자들의 내밀한 고백은, 적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말만큼은, 대개 어디서 베껴온 데다 뻔히 드러나는 은폐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은 끝없이 희망을 품는 일이다. 아버지가 속물근성을 드러내며 넌지시 말했고 나 역시 같은 속물근성으로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기본적인 예의와 도리를 아는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다른 몫으로 나뉘어 주어진다. 그 사실을 잊으면 무엇인가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직도 내게는 조금 남아 있다.

이렇게 내 관대함을 자랑하고 나니,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차례다. 사람의 행동은 단단한 바위에 뿌리를 둘 수도 있고 질척한 늪에 뿌리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나는 그 뿌리가 어디 있는지 더는 상관하지 않는다. 지난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온 세상이 제복을 입고 도덕적인 차렷 자세 같은 것을 영원히 취하고 있기를 바랐다. 특권처럼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난잡한 유람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내 이런 반응에서 예외가 된 사람은 이 책에 이름을 내준 개츠비뿐이었다—내가 꾸밈없이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개츠비가. 인격이란 성공적인 몸짓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개츠비에게는 무언가 눈부신 데가 있었다. 삶의 약속을 남달리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이 있어서, 마치 1만 마일 밖의 지진까지 기록하는 정교한 기계와 한통속인 듯했다. 이런 감응력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는 무른 감수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그것은 희망을 품는 비범한 재능이자 낭만을 향해 언제나 준비된 마음이었다.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그런 마음이었다. 아니다—개츠비는 결국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가 한동안 사람들의 열매 맺지 못하는 슬픔과 숨 짧은 환희에 관심을 끊게 된 까닭은, 개츠비를 갉아먹던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돌던 그 더러운 먼지에 있었다.

우리 집안은 이 중서부 도시에서 삼대째 이름 있고 유복한 집안으로 살아왔다. 캐러웨이 집안은 일종의 문중이라 할 만하며, 우리는 버클루 공작 가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가계의 터전을 세운 사람은 할아버지의 형제였다. 1851년에 이곳에 온 그분은 남북전쟁에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내보내고 철물 도매업을 시작했는데, 지금도 아버지가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이 종조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분을 닮았다고 한다—특히 아버지 사무실에 걸린 초상화 속의 꽤나 냉혹해 보이는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보다 꼭 사반세기 뒤인 1915년에 뉴헤이븐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얼마 후에는 대전쟁이라고 알려진 게르만족의 뒤늦은 민족 이동에 참가했다. 그 반격 원정이 어찌나 즐거웠던지 돌아와서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중서부는 이제 따뜻한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너덜너덜한 변두리처럼 보였다—그래서 동부로 가서 채권 일을 배우기로 했다. 아는 사람은 모두 채권 일을 하고 있었으니 독신 남자 하나쯤 더 먹여 살릴 여력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집안의 삼촌들과 아주머니들은 내 대학 진학 예비학교를 골라주기라도 하듯 이 문제를 의논하더니, 마침내 몹시 심각하고 망설이는 얼굴로 “뭐—그으래”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일 년 동안 돈을 대주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로 늦어진 끝에 나는 1922년 봄 동부로 왔다. 그때는 영영 이곳에 살 작정이었다.

실속을 따지자면 시내에 방을 얻어야 했지만, 계절은 따뜻했고 나는 드넓은 잔디밭과 정다운 나무들이 있는 고장을 막 떠나온 참이었다. 그래서 회사의 한 젊은이가 통근할 수 있는 교외 마을에 함께 집을 얻자고 했을 때 아주 좋은 생각으로 들렸다. 그가 구한 집은 한 달에 80달러짜리, 비바람에 시달린 판지처럼 허술한 방갈로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사가 그를 워싱턴으로 발령 내는 바람에 나는 혼자 교외로 나갔다. 내게는 개 한 마리—적어도 달아나기 전 며칠 동안은 내 개였다—와 낡은 닷지 한 대, 그리고 핀란드인 여자가 있었다. 가정부는 침대를 정돈하고 아침을 지어주었으며, 전기레인지 앞에서 핀란드식 지혜가 담긴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루 남짓 외로웠지만, 어느 날 아침 나보다 더 늦게 이사 온 남자가 길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웨스트에그 마을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남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갈 때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나는 길잡이이자 개척자이자 최초의 정착민이었다. 남자는 무심결에 내게 이 동네의 시민권을 내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햇살이 비치고, 빠르게 돌리는 영화 속에서처럼 나무마다 잎이 우르르 돋아나자, 여름과 함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익숙한 확신이 내게 찾아왔다.

우선 읽을 것이 너무나 많았고, 숨을 불어넣는 싱그러운 공기에서 한껏 끌어다 누릴 건강도 넘쳤다. 나는 은행업과 신용, 투자 유가증권에 관한 책을 열두 권 샀다. 책들은 조폐국에서 갓 나온 돈처럼 붉은색과 금색으로 책꽂이에 서서, 미다스와 모건과 마에케나스만 알던 찬란한 비밀을 펼쳐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그 밖에도 많은 책을 읽겠다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제법 문학적인 사람이었다—어느 해에는 『예일 뉴스』에 몹시 엄숙하고 뻔한 사설을 연재하기도 했다—이제 그런 모든 것을 내 삶에 다시 끌어들여, 모든 전문가 가운데 가장 폭이 좁은 부류인 “다방면에 두루 통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이것은 그저 경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결국 삶은 하나의 창으로 바라볼 때 훨씬 잘 보이는 법이다.

북아메리카에서도 손꼽히게 기묘한 동네에 집을 빌리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곳은 뉴욕에서 정동쪽으로 뻗어나간 길쭉하고 흥청거리는 섬에 있었다—그 섬에는 여러 신기한 자연 지형 가운데 유난히 특이한 두 지형이 있다. 시내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서 윤곽이 똑같은 거대한 달걀 두 개가, 체면치레로 끼워놓은 듯한 만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서반구에서 가장 잘 길들여진 바닷물로 튀어나와 있다. 거대하고 축축한 가축 마당 같은 롱아일랜드 해협이다. 둘 다 완전한 타원형은 아니다—콜럼버스의 일화에 나오는 달걀처럼 바닥에 닿는 쪽 끝이 납작하게 눌려 있다—하지만 생김새가 그토록 닮았다는 사실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갈매기들에게 언제나 경이로움을 안겨줄 것이다. 날개 없는 이들에게 더 흥미로운 현상은 두 곳이 모양과 크기를 빼고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웨스트에그에 살았다. 두 곳 가운데—뭐랄까, 덜 세련된 쪽이었다. 하지만 두 곳 사이의 기괴하고 적잖이 불길한 대조를 표현하기에는 지극히 피상적인 꼬리표다. 내 집은 달걀의 맨 끝, 롱아일랜드 해협에서 불과 50야드 떨어진 곳에 있었고, 한 철 임대료가 1만 2천이나 1만 5천 달러씩 하는 거대한 두 저택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른쪽 집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건물이었다—노르망디의 어느 Hôtel de Ville을 그대로 본뜬 집으로, 한쪽에는 탑이 솟아 있었고 여린 담쟁이가 성긴 수염처럼 덮였을 뿐 아직 번쩍번쩍 새것의 티가 났다. 대리석 수영장에다 40에이커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도 있었다. 개츠비의 저택이었다. 아니, 개츠비 씨를 알지 못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이름의 신사가 사는 저택이었다. 내 집은 눈에 거슬리는 흉물이었지만 작은 흉물이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갔다. 그 덕분에 나는 바다 전망에다 내 이웃의 잔디밭 일부가 보이는 전망, 그리고 백만장자들을 가까이 두었다는 위안을 누릴 수 있었다—그 모두가 한 달에 80달러였다.

체면치레로 끼워놓은 듯한 만 건너편에서는 세련된 이스트에그의 하얀 궁전들이 물가를 따라 반짝였다. 그해 여름 이야기는 내가 톰 뷰캐넌 부부와 저녁을 먹으려고 그곳으로 차를 몰고 간 날 저녁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데이지는 나와 한 항렬 차이의 칠촌이었고, 톰은 대학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시카고에서 그들과 이틀을 보내기도 했다.

데이지의 남편은 여러 운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뉴헤이븐에서 미식축구를 했던 엔드 선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축에 들었다—어떻게 보면 전국적인 유명 인사였다. 스물한 살에 한정된 분야에서 너무도 날카롭게 정점을 찍어버린 나머지, 그 뒤로는 무슨 일을 해도 맥이 빠지고 마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집안은 어마어마한 부자였다—대학 시절부터 돈을 물 쓰듯 써서 빈축을 샀다—그런데 이번에 시카고를 떠나 동부로 옮겨온 방식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를테면 레이크포리스트에서 폴로 경기용 말들을 한 무리나 데려온 것이다. 나와 같은 세대의 남자가 그런 일을 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은 좀처럼 실감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왜 동부로 왔는지는 모른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프랑스에서 일 년을 보냈고, 그 뒤로는 사람들이 함께 폴로를 하고 부유하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불안스레 떠돌아다녔다. 이번에는 영영 정착할 거라고 데이지는 전화로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데이지의 속내야 알 수 없었지만, 톰은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어느 미식축구 경기의 극적인 격동을 조금은 애틋하게 찾아 헤매며 끝없이 떠돌 것 같았다.

그리하여 따뜻한 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나는 실은 거의 알지도 못하는 두 옛 친구를 만나러 이스트에그로 차를 몰고 갔다. 그들의 집은 예상보다도 더 화려했다. 만을 내려다보는 붉은색과 흰색의 밝고 화사한 조지 왕조풍 식민지 양식 저택이었다. 잔디밭은 해변에서 시작해 현관문까지 사분의 일 마일을 달려왔다. 해시계와 벽돌길과 불타는 듯한 꽃밭을 뛰어넘어, 마침내 집에 이르러서는 달려온 기세를 못 이긴 듯 선명한 덩굴이 되어 벽을 타고 올라갔다. 집 정면에는 프랑스식 유리문들이 줄지어 뚫려 있었는데, 지금은 반사된 금빛으로 빛나며 따뜻한 바람이 부는 오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 앞에는 승마복 차림의 톰 뷰캐넌이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뉴헤이븐 시절과는 달라져 있었다. 이제 톰은 지푸라기 빛깔의 머리칼과 다소 냉혹한 입매, 거만한 태도를 지닌 건장한 서른 살 사내였다. 반짝이는 오만한 두 눈이 얼굴을 지배하고 있어서 언제나 공격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성스러울 만큼 멋을 부린 승마복조차 그 몸의 엄청난 힘을 감추지는 못했다—반들거리는 장화는 속이 꽉 차 위쪽 끈이 팽팽하게 당겨질 지경이었고, 얇은 상의 아래에서 어깨가 움직일 때면 커다란 근육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이었다—잔인한 몸이었다.

거칠고 쉰 테너의 말소리는 걸핏하면 성을 낼 듯한 인상을 더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낮춰 보는 듯한 경멸이 조금 섞여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랬다—뉴헤이븐에는 톰을 죽도록 싫어하던 사내들이 있었다.

“내가 너보다 힘도 세고 더 사내답다고 해서,” 톰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런 문제에 관한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는 여기지 마.” 우리는 같은 4학년 사교모임에 속해 있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늘 톰이 나를 좋게 보고 있으며, 거칠고 반항적인, 자기 나름의 애틋함으로 내가 자기를 좋아해주기를 바란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햇살이 드는 현관 앞에서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 괜찮은 집을 얻었지.” 톰이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내 한쪽 팔을 잡아 몸을 돌려놓더니, 넓적하고 평평한 손으로 앞쪽 풍경을 쓸어 보였다. 그 손짓 안에는 주변보다 낮게 파놓은 이탈리아식 정원과 짙고 톡 쏘는 향을 풍기는 반 에이커의 장미밭,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밀려오는 물결에 통통 부딪히는 뭉툭한 뱃머리의 모터보트가 들어갔다.

“석유업자 드메인의 집이었어.” 톰은 정중하면서도 갑작스러운 동작으로 내 몸을 다시 돌려놓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천장 높은 현관 홀을 지나 밝은 장밋빛 공간으로 들어갔다. 양 끝의 프랑스식 유리문으로 집에 가냘프게 매여 있는 듯한 방이었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집 안으로 조금 자라 들어온 듯한 바깥의 싱싱한 잔디를 배경으로 하얗게 빛났다. 미풍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한쪽 끝에서는 커튼을 안으로, 반대쪽 끝에서는 밖으로 불어내며 창백한 깃발처럼 펄럭이게 하고, 설탕 크림을 바른 웨딩 케이크 같은 천장 쪽으로 비틀어 올렸다. 그러고는 포도주색 양탄자 위로 잔물결처럼 번져가며, 바다 위의 바람처럼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방 안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물건은 거대한 소파뿐이었다. 그 위에는 젊은 여자 둘이 닻에 매인 기구 위에 올라탄 듯 떠 있었다. 둘 다 흰옷을 입었고, 드레스는 집 둘레를 잠깐 날아다니다 바람에 밀려 막 돌아온 것처럼 물결치며 나부꼈다. 나는 커튼이 휘몰아치며 펄럭이는 소리와 벽에 걸린 그림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톰 뷰캐넌이 뒤쪽 유리문을 닫자 쿵 소리가 났고, 갇힌 바람이 방 안 곳곳에서 잦아들었다. 커튼과 양탄자와 두 젊은 여자는 풍선처럼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둘 가운데 더 젊은 쪽은 처음 보는 여자였다. 긴 소파의 한쪽 끝에 몸을 쭉 뻗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턱을 조금 치켜들고 있었다. 자칫 떨어질 만한 물건을 턱 위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사람 같았다.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 해도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오히려 내가 당황해, 들어와서 방해한 것이 미안하다고 중얼거릴 뻔했다.

다른 여자, 데이지는 일어나려고 했다—예의를 다하려는 표정으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그러더니 우습고 매력적인 작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너무 기뻐서 꼼, 꼼짝을 못 하겠어.”

데이지는 대단히 재치 있는 말이라도 한 듯 다시 웃으며 잠시 내 손을 잡았다.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눈길은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나라고 약속하는 듯했다. 데이지에게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 그러고는 턱으로 균형을 잡는 아가씨의 성이 베이커라고 나직이 귀띔했다. (데이지가 속삭이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하려는 수작일 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트집은 아무 상관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속삭임의 매력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어쨌든 베이커 양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고,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짝 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빨리 다시 뒤로 젖혔다—균형을 잡고 있던 물건이 조금 흔들려 적잖이 놀란 것이 분명했다. 또다시 사과 비슷한 말이 입술까지 올라왔다. 누군가 완전히 자족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는 거의 예외 없이 넋을 잃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나는 다시 내 친척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낮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귀가 절로 그 오르내림을 따라가게 되는 목소리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들의 배열이라도 되는 듯했다. 얼굴은 슬프고 아름다웠으며, 그 안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었다. 빛나는 눈과 정열로 빛나는 입이었다. 하지만 데이지를 사랑했던 남자들이 좀처럼 잊지 못하는 것은 목소리에 담긴 설렘이었다. 노랫가락처럼 잡아끄는 힘, 속삭이는 “들어봐”, 조금 전에도 즐겁고 짜릿한 일을 겪었고 다음 한 시간에도 즐겁고 짜릿한 일이 맴돌고 있으리라는 약속이었다.

나는 동부로 오는 길에 시카고에 하루 들렀던 이야기와, 열두 사람이 나를 통해 안부를 전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들 날 그리워하니?” 데이지가 황홀해하며 물었다.

“온 도시가 황량해. 자동차마다 애도의 화환 삼아 왼쪽 뒷바퀴를 검게 칠했고, 북쪽 물가에서는 밤새 통곡이 끊이지 않아.”

“근사하다! 우리 돌아가자, 톰. 내일!” 그러더니 뜬금없이 덧붙였다. “우리 아기 봐야지.”

“보고 싶어.”

“자고 있어. 세 살이야. 한 번도 못 봤니?”

“한 번도.”

“그럼 꼭 봐야지. 애가—”

방 안을 쉴 새 없이 서성이던 톰 뷰캐넌이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일 하냐, 닉?”

“채권 일을 해.”

“어느 회사?”

나는 회사 이름을 알려주었다.

“들어본 적 없어.” 톰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다.

“듣게 될 거야.”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부에 계속 있으면 듣게 될 거야.”

“아, 동부에 계속 있을 테니까 걱정 마.” 톰은 뭔가 다른 낌새를 살피듯 데이지를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다른 데서 살면 내가 빌어먹을 등신이지.”

이때 베이커 양이 “당연하죠!” 하고 불쑥 말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내가 방에 들어온 뒤 처음 입을 연 것이었다. 본인도 나만큼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하품을 하더니 재빠르고 능숙한 동작을 잇달아 보이며 방 한가운데로 일어섰다.

“몸이 다 굳었어요.” 베이커 양이 투덜거렸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저 소파에 누워 있었어요.”

“나 보지 마.” 데이지가 받아쳤다. “오후 내내 널 뉴욕에 데려가려고 했잖아.”

“아뇨, 됐어요.” 베이커 양이 마침 식기실에서 나온 칵테일 네 잔을 향해 말했다. “지금 철저히 몸 관리 중이거든요.”

집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베이커 양을 보았다.

“정말요!” 톰은 잔 바닥에 한 방울 남은 술이라도 되는 듯 자기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도대체 무슨 수로 뭘 해내는지 나로서는 모르겠어요.”

나는 대체 무엇을 “해낸다”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베이커 양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가슴이 작고 날씬한 아가씨로, 자세가 곧았으며 어린 사관생도처럼 어깨를 뒤로 젖혀 그 곧은 자세를 한층 도드라지게 했다. 창백하고 매력적이며 불만스러운 얼굴 속에서, 햇볕에 시달린 회색 눈이 예의 바르게 나와 똑같은 호기심을 품고 마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어디선가 베이커 양을, 아니면 사진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트에그에 사시죠.” 베이커 양이 깔보는 말투로 말했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어요.”

“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개츠비는 아실 텐데요.”

“개츠비?” 데이지가 되물었다. “어느 개츠비?”

내 이웃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저녁 준비가 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톰 뷰캐넌은 힘이 들어간 팔을 명령하듯 내 팔 밑에 밀어 넣고, 체커 말을 다른 칸으로 옮기듯 나를 방 밖으로 몰아냈다.

두 젊은 여자는 늘씬한 몸을 나른하게 움직이며, 손을 가볍게 허리에 얹고 우리보다 먼저 장밋빛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는 석양을 향해 트여 있었고, 식탁 위에서는 잦아든 바람 속에 촛불 네 개가 흔들렸다.

“촛불은 왜 켰어?” 데이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했다. 손가락으로 집어 촛불을 껐다. “이 주만 있으면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인데.” 환한 얼굴로 우리 모두를 둘러보았다. “다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을 기다리다가 정작 그날은 놓쳐버리지 않아? 나는 늘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을 기다리다가 정작 놓쳐버려.”

“뭔가 계획을 세워야겠어.” 베이커 양이 하품하며 침대에 들어가듯 식탁에 앉았다.

“좋아.” 데이지가 말했다. “무슨 계획을 세울까?” 그러고는 막막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무슨 계획을 세우니?”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데이지의 눈이 놀란 기색으로 자기 새끼손가락에 꽂혔다.

“봐!” 데이지가 투덜거렸다. “다쳤어.”

우리는 모두 보았다—손가락 마디가 검푸르게 멍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랬잖아, 톰.” 데이지가 나무라듯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 줄 알아. 그래도 그러긴 했잖아. 야수 같은 남자랑 결혼한 대가가 이거야. 어마어마하게 크고 우락부락한 육체의 표본 같은—”

“난 ‘우락부락하다’는 말이 질색이야.” 톰이 짜증스럽게 반박했다. “농담이라도.”

“우락부락.” 데이지가 고집했다.

때로 데이지와 베이커 양은 동시에 말을 했다. 그래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 장난스럽게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들은 결코 수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말들은 흰 드레스처럼, 또 아무 욕망도 없이 무심한 눈빛처럼 서늘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었고, 톰과 나를 받아들였으며, 그저 예의 바르고 기분 좋게 남을 즐겁게 해주거나 스스로 즐기려 조금 애쓸 뿐이었다. 곧 저녁 식사가 끝나고 조금 더 지나면 저녁 시간도 끝나, 아무렇지도 않게 치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부와는 뚜렷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거듭 실망으로 끝나는 기대 속에서, 아니면 바로 그 순간이 두려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저녁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허둥지둥 끝을 향해 내달렸다.

“너랑 있으면 내가 미개인 같아, 데이지.” 코르크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제법 훌륭한 클라레를 두 잔째 마시며 내가 털어놓았다. “농작물 얘기나 그런 건 못 해?”

특별한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문명이 무너지고 있어.” 톰이 격렬하게 불쑥 말했다. “난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에 아주 비관적이 됐어. 고더드라는 사람이 쓴 『유색 제국의 발흥』 읽어봤어?”

“아니, 못 읽어봤어.” 나는 그 말투에 좀 놀라며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책이야. 누구나 읽어야 해.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백인종은—완전히 잠식당하고 만다는 거야. 전부 과학적인 내용이야. 입증된 거라고.”

“톰은 요즘 아주 심오해지고 있어.” 데이지가 별생각 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긴 단어가 나오는 깊이 있는 책들을 읽거든. 그 단어가 뭐였더라, 우리가—”

“아니, 이런 책들은 전부 과학적이라니까.” 톰이 답답하다는 듯 데이지를 흘겨보며 우겼다. “이 사람이 모든 걸 다 밝혀냈어. 지배 인종인 우리가 조심해야 해. 안 그러면 다른 인종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우리가 짓눌러야겠네.” 데이지가 뜨겁게 내리쬐는 해를 향해 사납게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살아보셔야겠네요—” 베이커 양이 말을 꺼냈지만, 톰이 의자에서 육중하게 몸을 움직이며 말을 끊었다.

“이 얘기의 요점은 우리가 북유럽 인종이라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조던도 그렇고, 또—” 아주 잠깐 망설인 뒤 톰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데이지도 포함시켰다. 데이지가 다시 내게 윙크했다. “—그리고 문명을 이루는 모든 것을 우리가 만들어냈다는 거야—뭐, 과학과 예술, 그런 것들 말이야. 알겠어?”

그렇게 열중하는 모습에는 어딘가 애처로운 데가 있었다. 예전보다 더 강해진 자기만족도 이제는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거의 곧바로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집사가 베란다를 떠나자, 데이지는 잠깐 말이 끊긴 틈을 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 집 비밀 하나 말해줄게.” 데이지가 신이 나서 속삭였다. “집사 코에 관한 얘기야. 집사 코 얘기 듣고 싶니?”

“그 얘기 들으러 오늘 밤 온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은 처음부터 집사는 아니었어. 예전에는 뉴욕의 어떤 집에서 은식기를 닦았는데, 그 집에는 이백 명분의 은식기가 있었대. 아침부터 밤까지 그걸 닦아야 했지. 그러다가 결국 코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거야—”

“갈수록 더 나빠진 거네.” 베이커 양이 거들었다.

“응. 갈수록 더 나빠져서 결국 그 일을 그만둬야 했대.”

잠깐, 마지막 햇살이 데이지의 환한 얼굴에 연정 어린 빛을 드리웠다. 나는 그 목소리에 이끌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러다 빛이 사라졌다. 빛 한 줄기 한 줄기가 못내 아쉬워하며 데이지를 떠났다. 해 질 무렵 즐거운 거리를 떠나는 아이들처럼.

집사가 돌아와 톰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자를 뒤로 밀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가 빈 것이 안에서 무언가를 일깨우기라도 한 듯, 데이지는 다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목소리가 환하게 빛나며 노래했다.

“닉, 네가 내 식탁에 앉아 있으니 참 좋아. 널 보면 꼭—장미가 생각나. 영락없는 장미야. 그렇지 않니?” 데이지는 확인을 구하듯 베이커 양을 돌아보았다. “영락없는 장미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장미와는 닮은 데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즉흥적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데이지에게서는 마음을 흔드는 온기가 흘러나왔다. 그 숨 가쁘고 짜릿한 낱말 가운데 하나에 숨어, 마음이 듣는 사람에게로 빠져나오려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냅킨을 식탁에 던져놓고 양해를 구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베이커 양과 나는 일부러 아무 뜻도 담지 않은 짧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내가 말을 하려는데 베이커 양이 정신을 바짝 차린 듯 몸을 세우며 경고하는 목소리로 “쉿!” 했다. 저쪽 방에서 낮지만 격정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베이커 양은 거리낌 없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 귀를 기울였다. 말소리는 알아들을 듯 말 듯한 지점에서 떨리다가 낮아지고, 흥분하여 높아지더니, 완전히 끊겼다.

“아까 말한 그 개츠비 씨가 내 이웃이에요—” 내가 말을 꺼냈다.

“말하지 말아요. 어떻게 되는지 듣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나요?” 내가 순진하게 물었다.

“모른단 말이에요?” 베이커 양이 정말로 놀라서 말했다. “모두 아는 줄 알았는데.”

“난 몰라요.”

“그게—” 베이커 양이 망설이며 말했다. “톰은 뉴욕에 여자가 있어요.”

“여자가 있다고요?”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베이커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 때는 전화를 안 하는 정도의 예의는 있어야죠. 안 그래요?”

그 말뜻을 채 알아듣기도 전에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고 가죽 장화가 삐걱거리더니, 톰과 데이지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어!” 데이지가 팽팽하게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데이지는 자리에 앉아 베이커 양과 나를 차례로 살피듯 보더니 말을 이었다. “잠깐 바깥을 봤는데, 바깥이 정말 낭만적이야. 잔디밭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아마 커나드나 화이트스타 정기선을 타고 건너온 나이팅게일인가 봐. 쉬지 않고 노래하고 있어—” 데이지의 목소리가 노래했다. “낭만적이지 않아, 톰?”

“아주 낭만적이지.” 톰이 대답하더니 내게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먹고도 아직 밝으면 마구간을 보여주고 싶어.”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데이지가 톰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마구간 이야기는,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식탁에서 보낸 마지막 오 분의 부서진 조각들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이 촛불이 다시 켜졌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으면서도 모든 눈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데이지와 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는 회의주의를 터득한 듯한 베이커 양조차 이 다섯 번째 손님의 날카로운 쇳소리 같은 다급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어떤 성격의 사람에게는 흥미진진한 상황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내 본능은 당장 경찰에 전화하라고 했다.

말 이야기는,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다시 나오지 않았다. 톰과 베이커 양은 몇 피트 너비의 황혼을 사이에 두고 서재로 천천히 돌아갔다. 실체가 분명한 시신 곁을 지키러 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나는 상냥하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귀는 조금 어두운 듯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데이지를 따라 줄줄이 이어진 베란다를 돌아 집 앞 현관 쪽으로 갔다. 그곳의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등나무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데이지는 아름다운 윤곽을 더듬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눈길은 차츰 벨벳 같은 황혼 속으로 옮겨갔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보여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혀줄 만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질문을 어린 딸에 관해 했다.

“우린 서로를 그다지 잘 모르잖아, 닉.” 데이지가 갑자기 말했다. “친척인데도. 넌 내 결혼식에도 안 왔지.”

“아직 전쟁에서 돌아오기 전이었어.”

“그랬지.” 데이지가 망설였다. “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어, 닉. 이젠 모든 것에 꽤 냉소적이 됐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기다렸지만 데이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다소 맥없이 딸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젠 말도 하고—밥도 먹고, 다 하겠네.”

“아, 그럼.” 데이지가 멍하니 나를 보았다. “있잖아, 닉.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줄게. 듣고 싶어?”

“아주.”

“내가 세상일을 어떻게 느끼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애가 태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을 때였는데, 톰이 어디 있었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실 일이었어. 에테르 마취에서 깨어났는데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이 들어서 곧장 간호사에게 아들인지 딸인지 물었지. 딸이라고 하기에 고개를 돌리고 울었어. ‘좋아.’ 내가 말했어. ‘딸이라 다행이야. 그 애가 바보가 되면 좋겠어—이 세상에서 여자애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그거니까. 예쁘고 조그만 바보.’”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어쨌든 모든 게 끔찍해.” 데이지가 확신에 차서 말을 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은 말이야. 그리고 난 알아. 어디든 가봤고 모든 걸 봤고 모든 걸 해봤어.” 톰과 꽤 비슷하게 도전적인 눈빛으로 주위를 훑더니, 짜릿한 경멸을 담아 웃었다. “세상 물정에 훤해졌지—맙소사, 난 세상 물정에 훤해!”

목소리가 끊기고 내 주의와 믿음을 더는 붙잡지 않게 된 순간, 나는 그 말의 밑바탕에 깔린 진실하지 못함을 느꼈다. 그날 저녁 전체가 내게서 동조하는 감정 한 자락을 거둬내려는 일종의 수작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데이지는 아름다운 얼굴에 노골적으로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나를 보았다. 자신과 톰이 속한 상당히 명망 높은 비밀결사의 회원임을 내세우기라도 한 듯했다.

안에서는 진홍색 방에 불빛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톰과 베이커 양은 긴 소파의 양 끝에 앉아 있었고, 베이커 양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주고 있었다—나지막하고 억양 없는 말들이 한데 이어져 마음을 가라앉히는 가락을 이루었다. 톰의 장화 위에서는 밝게 빛나고 가을 잎처럼 노란 베이커 양의 머리칼 위에서는 흐릿해진 등불이, 가느다란 팔 근육을 살랑 움직여 책장을 넘길 때마다 지면을 따라 반짝였다.

우리가 들어가자 베이커 양은 손을 들어 잠시 우리를 조용히 시켰다.

“계속됩니다.” 잡지를 탁자 위로 던지며 말했다. “바로 다음 호에.”

몸은 무릎을 들썩여 제 뜻을 알렸고, 베이커 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 시네요.” 천장에서 시간을 알아낸 듯 말했다. “이 착한 아가씨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에요.”

“조던은 내일 시합에 나가.” 데이지가 설명했다. “웨스트체스터에서.”

“아—그 조던 베이커였군요.”

이제야 왜 낯이 익었는지 알았다—애슈빌과 핫스프링스와 팜비치의 스포츠계 풍경을 담은 수많은 윤전 그라비어 사진 속에서, 그 매력적이면서도 남을 깔보는 표정이 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베이커 양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비난조의 불쾌한 이야기였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잘 자.” 조던이 부드럽게 말했다. “여덟 시에 깨워줄래?”

“일어날 거면.”

“일어날게. 안녕히 주무세요, 캐러웨이 씨. 머지않아 또 만나요.”

“물론 또 만나야지.” 데이지가 맞장구쳤다. “실은 내가 둘을 결혼시켜볼까 해. 자주 놀러 와, 닉. 내가 어떻게든—아—둘을 한데 밀어넣을게. 있잖아—실수인 척 침구장에 둘을 가둬놓고 보트에 태워 바다로 떠밀어 보내고, 그런 식으로—”

“잘 자.” 베이커 양이 계단에서 외쳤다. “난 한마디도 못 들었어.”

“괜찮은 아가씨야.” 잠시 후 톰이 말했다. “저렇게 온 나라를 돌아다니게 놔둬선 안 되는데.”

“누가 놔둬선 안 된다는 건데?” 데이지가 차갑게 물었다.

“집안에서.”

“집안이라야 나이가 한 천 살쯤 되는 아주머니 하나뿐이야. 게다가 닉이 조던을 돌봐줄 거야. 그렇지, 닉? 올여름에는 여기서 주말을 많이 보낼 거거든. 가정적인 분위기가 걔한테 아주 좋을 것 같아.”

데이지와 톰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뉴욕 출신이야?” 내가 얼른 물었다.

“루이빌. 우린 거기서 새하얀 소녀 시절을 함께 보냈어. 우리의 아름답고 새하얀—”

“베란다에서 닉이랑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 좀 했어?” 톰이 갑자기 물었다.

“그랬나?” 데이지가 나를 보았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북유럽 인종 얘기를 했던 것 같아. 그래, 분명히 그랬어. 그 얘기가 슬그머니 끼어들더니 어느새—”

“듣는 말 다 믿지는 마, 닉.” 톰이 내게 충고했다.

나는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가볍게 말했고, 몇 분 뒤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문까지 따라 나와 환한 네모꼴 불빛 속에 나란히 섰다. 내가 시동을 걸자 데이지가 명령조로 외쳤다. “잠깐!”

“중요한 걸 하나 물어본다는 걸 잊었네. 네가 서부에 있는 아가씨와 약혼했다는 얘길 들었어.”

“맞아.” 톰이 다정하게 거들었다. “네가 약혼했다는 얘길 들었어.”

“모함이야. 난 너무 가난해.”

“하지만 들었다니까.” 데이지가 우겼다. 다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 “세 사람한테서 들었으니 사실일 거야.”

물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았지만, 나는 약혼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문이 혼인 공고를 내버렸다는 사실도 내가 동부에 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소문 때문에 오랜 친구와 만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소문에 떠밀려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두 사람의 관심은 제법 가슴에 와닿았고, 아득히 멀게만 보이던 그 부자들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그럼에도 차를 몰고 떠나는 내 마음은 혼란스러웠고 조금은 역겨웠다. 내가 보기에 데이지는 아이를 안고 그 집에서 뛰쳐나와야 했다—하지만 정작 데이지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톰의 경우에는 “뉴욕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보다 책 한 권 때문에 풀이 죽어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놀라웠다. 튼튼한 육체에 뿌리 둔 자아도취로는 더 이상 고압적인 마음을 먹여 살릴 수 없는 듯, 톰은 무언가에 이끌려 케케묵은 관념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길가 주점의 지붕 위와, 빨간 새 주유기들이 빛의 웅덩이에 서 있는 길가 정비소 앞에는 벌써 여름이 깊어 있었다. 웨스트에그의 내 영지에 도착한 나는 차를 차고에 넣고 뜰에 내버려둔 잔디 다지는 롤러 위에 잠시 앉았다. 바람은 잦아들고 밝고 떠들썩한 밤이 남아 있었다. 나무에서는 날개 치는 소리가 났고, 대지의 한껏 부푼 풀무가 개구리들 속에 생명을 가득 불어넣어 오르간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걸어가는 고양이의 검은 형체가 달빛 속을 일렁이며 지나갔다.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50피트 떨어진 곳에, 누군가 내 이웃의 저택 그림자에서 나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서서 은빛 후추를 뿌린 듯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긋한 몸짓과 잔디밭에 든든히 디딘 두 발의 자세로 미루어, 우리 동네 하늘 가운데 자기 몫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려고 나온 개츠비 씨 본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불러보기로 했다. 저녁 식사 때 베이커 양이 개츠비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이면 인사를 나눌 구실은 충분했다. 하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개츠비가 문득 혼자인 것에 만족한다는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다—기묘한 자세로 어두운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는데, 그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몸을 떨고 있다고 맹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바다 쪽을 보았다—아주 작고 아득한 초록 불빛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두 끝에 있는 불빛인지도 몰랐다. 개츠비를 찾으려고 다시 눈길을 돌렸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나는 불안한 어둠 속에 다시 혼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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