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성
L. M. Montgomery
제1장
어느 5월 아침에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밸런시 스털링의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일가붙이들과 함께 웰링턴 아주머니의 약혼 기념 소풍에 갔을 것이고, 트렌트 박사는 몬트리올로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비가 내렸고, 그 때문에 밸런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들려주려 한다.
밸런시는 일찍 잠에서 깼다. 동트기 직전, 생기도 희망도 없는 시간이었다. 잠을 그리 잘 자지 못했다. 내일이면 스물아홉인데 아직 미혼이고, 사는 동네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나 미혼이란 그저 남자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뜻으로만 통한다면, 때로 잠을 설칠 수도 있는 법이다.
디어우드 사람들과 스털링 일가는 오래전에 밸런시를 가망 없는 노처녀로 밀어 놓았다. 하지만 밸런시 자신은 언젠가는 낭만적인 사랑이 찾아오리라는 가엾고 부끄러운 작은 희망을 한 번도 완전히 버린 적이 없었다—이 비 내리는 끔찍한 아침, 잠에서 깨어 자신이 스물아홉이며 어떤 남자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렇다, 가슴을 찌르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밸런시는 노처녀라는 사실 자체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 보면 노처녀로 사는 것이 웰링턴 삼촌이나 벤저민 삼촌, 심지어 허버트 삼촌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사는 것만큼 끔찍할 리는 없었다. 괴로운 것은 노처녀 말고 다른 무엇이 될 기회조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남자도 밸런시를 원한 적이 없었다.
희끗해지기 시작한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있자 눈물이 고였다. 마음껏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울다가 심장 언저리의 통증이 또 도질까 봐 두려웠다. 잠자리에 들고 나서도 한 차례 통증이 왔는데, 이제껏 어느 때보다 좀 더 심했다. 또 아침 식탁에서 어머니가 빨개진 눈을 알아보고는 그 까닭을 캐묻느라 모기처럼 끈질기게 시시콜콜한 질문을 해댈까 봐 두려웠다.
“내가 사실대로 ‘결혼을 못 해서 울어요’라고 대답하면 어떨까.” 밸런시는 처참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기겁하실까—정작 어머니는 노처녀 딸을 날이면 날마다 부끄러워하시면서.”
하지만 물론 체면은 지켜야 했다. “처녀답지 못하다.” 밸런시에게는 어머니의 새침하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단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자 생각을 하는 건 처녀답지 못한 일이다.”
어머니가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밸런시에게는 일가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 하기야 밸런시에게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면이 꽤 많았다. 하지만 웃음은 그저 겉돌 뿐이었다. 이내 밸런시는 작고 무력한 몸을 웅크린 채 누워,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추하고 누추한 방 안으로 스며드는 차갑고 무자비한 빛을 넌더리가 나도록 바라보았다.
그 방의 추한 구석구석을 밸런시는 눈을 감고도 알았다—속속들이 알았고, 싫어했다. 노란 페인트칠을 한 바닥에는 침대 옆으로 흉측한 “고리뜨기” 깔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고리뜨기”로 새긴 우스꽝스러운 개는 잠에서 깰 때마다 밸런시를 향해 히죽댔다. 빛바랜 짙은 붉은색 벽지, 오래전 물이 샌 얼룩에 이리저리 금까지 간 천장, 비좁고 옹색한 작은 세숫대, 보라색 장미 무늬가 있는 갈색 종이 장식 가리개, 변변찮은 화장대에 받쳐 세운 얼룩투성이에 가로로 금까지 간 낡은 거울, 어머니가 전설 같은 신혼여행 시절에 만든 해묵은 포푸리가 담긴 단지, 스티클스 아주머니가 그에 못지않게 전설 같은 처녀 시절에 만든 조개껍데기를 붙인 상자와 그 터진 귀퉁이, 구슬 술이 반이나 떨어져 나간 구슬 장식 바늘꽂이, 딱딱한 노란 의자 하나, 스털링 증조할머니의 엄한 늙은 얼굴 둘레에 색실로 수놓은 빛바랜 옛 문구 “떠났으나 잊히지 않았네”, 아래층 방들에서 진작 쫓겨난 아주 옛적 친척들의 낡은 사진들. 친척 모습이 아닌 그림은 두 점뿐이었다. 하나는 비 내리는 문간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그린 낡은 채색 석판화였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밸런시는 마음이 괴로웠다. 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문간에 웅크린 저 처량한 강아지! 어째서 누구 하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는 걸까? 다른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는 루이제 왕비를 그린, 종이 테두리를 두른 빛바랜 판화였다. 열 번째 생일에 웰링턴 아주머니가 선심을 써서 선물한 것이었다. 십구 년 동안 밸런시는 그 그림을 바라보며 아름답고 잘난 체하고 제멋에 겨운 루이제 왕비를 미워했다. 하지만 감히 없애거나 치울 엄두는 내지 못했다. 어머니와 스티클스 아주머니가 아연실색할 터였다. 아니, 밸런시가 속으로 버릇없이 표현하는 대로라면, 발작을 일으킬 터였다.
물론 집 안의 방은 하나같이 추했다. 그래도 아래층에서는 어느 정도 체면치레를 했다. 남들이 보지도 않는 방에 쓸 돈은 없었다. 밸런시는 허락만 해준다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제 손으로 방을 좀 꾸며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심스레 꺼내는 제안마다 안 된다고 했고, 밸런시는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밸런시는 무슨 일이든 밀어붙이는 법이 없었다. 겁이 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반대를 참아 내지 못했다. 스털링 부인은 기분이 상하면 모욕당한 공작부인이라도 된 양 며칠씩 뚱해 있었다.
밸런시가 제 방에서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밤에 그곳에서 혼자가 되어, 울고 싶으면 울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하지만 잠을 자고 옷을 갈아입는 데만 쓰는 방이야 좀 추한들 무슨 상관이랴? 밸런시는 그 두 가지 일 말고는 어떤 이유로도 방에 혼자 머물 수 없었다. 프레더릭 스털링 부인과 스티클스 아주머니가 믿기로는 혼자 있고 싶다는 사람은 필시 무슨 불순한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하지만 푸른 성에 있는 밸런시의 방은 방이라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주눅 들고 억눌리고 묵살당하고 핀잔을 듣는 밸런시였지만, 공상 속에서는 제법 화려하게 제 뜻대로 살곤 했다. 스털링 일가나 그 곁가지 친척들 중에는 누구도 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스티클스 아주머니는 더더욱 그랬다. 밸런시에게 집이 두 채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엘름가의 보기 흉한 붉은 벽돌 상자 같은 집과 스페인의 푸른 성. 기억이 닿는 가장 먼 시절부터 밸런시는 마음으로는 푸른 성에서 살았다. 그 성이 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언제든 눈만 감으면 아름답고 낯선 나라의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소나무 우거진 산꼭대기에 탑과 깃발을 세운 성이 아스라한 푸른 아름다움에 싸인 채 뚜렷이 보였다. 그 성에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이란 모두 있었다. 여왕들이 몸에 둘렀을 법한 보석, 달빛과 불꽃으로 지은 옷, 장미와 황금의 긴 의자, 낮은 단이 길게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과 그 위의 커다란 흰 항아리들, 안개를 두르고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호리호리한 처녀들, 반짝이는 분숫물이 쏟아지고 도금양 사이에서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대리석 기둥의 뜰, 잘생긴 기사와 아름다운 여인들만 비추는 거울의 홀—그중에서도 밸런시가 가장 아름다워서, 남자들은 그 눈길 한 번을 얻으려 목숨을 바쳤다. 지루한 나날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밤에 공상의 향연을 벌일 수 있다는 희망뿐이었다. 밸런시가 푸른 성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절반만 알았어도 스털링 일가는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기겁해서 죽었을 것이다.
우선 그 안에는 연인이 꽤 여럿 있었다. 아, 물론 한 번에 한 사람씩이었다. 기사도 시대의 낭만적인 열정을 모두 바쳐 구애하고, 오래도록 헌신하고 숱한 대담한 모험을 치른 끝에 밸런시의 마음을 얻어, 깃발로 장식한 푸른 성의 커다란 예배당에서 성대하고 화려하게 밸런시와 결혼하는 연인이.
밸런시가 열두 살일 때 그 연인은 금빛 곱슬머리에 하늘처럼 파란 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열다섯 살 때에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고 얼굴이 창백했다. 물론 여전히 잘생긴 것은 필수였다. 스무 살 때에는 금욕적이고 몽상적이고 영적인 사람이었다. 스물다섯 살 때에는 턱선이 또렷하고 조금 매서운 데가 있었으며,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 강인하고 투박했다. 푸른 성에서 밸런시는 스물다섯 살보다 나이를 더 먹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아주 최근에는—그 주인공이 붉은 기가 도는 황갈색 머리와 비뚜름한 미소, 수수께끼 같은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밸런시가 나이가 들어 더는 마음에 차지 않게 된 연인들을 일부러 살해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새 연인이 나타나면 앞서 있던 연인은 그저 스르르 사라졌을 뿐이다. 푸른 성이라는 곳은 이런 점에서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아침, 밸런시는 푸른 성의 열쇠를 찾을 수 없었다.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만드는 작은 개처럼 발꿈치에 따라붙어 짖어댔다. 밸런시는 스물아홉이었고, 외로웠고, 아무도 원해 주지 않았고, 못생겼다—모두 잘생긴 일가에서 혼자만 못생긴 여자였고,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아무리 먼 과거를 돌아보아도 삶은 칙칙하고 빛깔이 없었다. 어디에도 진홍빛이나 자줏빛 한 점 없었다. 아무리 먼 앞날을 내다보아도, 겨울 나뭇가지에 홀로 매달린 작고 시든 잎사귀 하나가 될 때까지 틀림없이 똑같으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자가 살아갈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을—사랑도, 의무도, 목적도, 희망도 없음을—깨닫는 순간, 그 여자는 죽음의 쓰라림을 맛본다.
“그런데도 살기를 멈출 수가 없으니 계속 살아야만 해. 여든 살까지 살아야 할지도 몰라.” 밸런시는 다급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끔찍하게도 다들 오래 살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
비가 와서 기뻤다—아니, 그저 비가 온다는 데 울적한 만족감을 느꼈다고 해야겠다. 그날은 소풍이 없을 터였다. 웰링턴 아주머니와 웰링턴 삼촌은—누구나 두 사람을 언제나 그 순서로 떠올렸다—삼십 년 전 소풍에서 약혼한 일을 기념해 해마다 어김없이 소풍을 갔다. 이 연례 소풍은 근년에 들어 밸런시에게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얄궂은 우연으로 그날은 밸런시의 생일과 겹쳤고, 스물다섯을 넘기고부터는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잊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소풍에 가기가 아무리 싫어도 안 가겠다고 맞설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타고난 성정에 반항기란 조금도 없는 듯했다. 소풍에서 저마다 무슨 말을 할지도 훤히 알았다. 밸런시는 웰링턴 삼촌을 싫어하고 경멸했다. 스털링 일가의 최고 염원인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기”를 이루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돼지처럼 꿀꿀대는 소리로 속삭일 것이다. “아직도 결혼할 생각은 없니, 얘야?” 그러고는 늘 시답잖은 말을 끝맺을 때마다 그러듯 쩌렁쩌렁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밸런시가 꼼짝도 못 하고 두려워하는 웰링턴 아주머니는 올리브의 새 시폰 드레스와 세실이 최근에 보낸 사랑 가득한 편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밸런시는 마치 제 드레스이고 제게 온 편지인 양 반갑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웰링턴 아주머니의 기분이 상할 테니까. 밸런시는 오래전에 웰링턴 아주머니의 비위를 거스르느니 차라리 하느님의 비위를 거스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느님은 용서해 줄지도 모르지만 웰링턴 아주머니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앨버타 아주머니는 엄청나게 뚱뚱했고, 마치 세상에 남자라고는 제 남편 하나뿐인 양 언제나 남편을 “그이”라고 부르는 정겨운 버릇이 있었다. 젊었을 적 대단한 미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하는 앨버타 아주머니는 밸런시의 누렇게 뜬 피부를 가엾어하며 위로할 것이다—
“요즘 아가씨들은 왜 하나같이 그렇게 햇볕에 탔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처녀였을 때는 크림같이 흰 피부에 장밋빛이 돌았지. 캐나다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로 꼽혔단다, 얘야.”
어쩌면 허버트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몰랐다—아니면 농담조로 “도스, 너 점점 뚱뚱해지네!”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모두들 작고 가엾고 삐쩍 마른 도스가 살이 찐다는 그 대단히 우스운 생각에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잘생기고 근엄한 제임스 삼촌을 밸런시는 싫어하면서도 존경했다. 아주 영리하다는 평판 덕분에 집안에서는 삼촌의 말을 신탁처럼 받들었다—스털링 집안 친척들 중에 머리 좋은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삼촌은 아마도 제게 그런 명성을 안겨 준 올빼미 같은 빈정거림으로 한마디 할 것이다. “요즘은 혼수 상자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이구나?”
그리고 벤저민 삼촌은 쌕쌕거리며 킬킬 웃는 사이사이에 지긋지긋한 수수께끼를 몇 개 내고는 제 입으로 답을 댈 것이다.
“도스와 생쥐의 차이가 뭔지 아니?”
“생쥐는 치즈를 해치고 싶고, 도스는 사내들 마음을 훔치고 싶거든.”
밸런시는 그 수수께끼를 쉰 번 들었고, 들을 때마다 삼촌에게 뭔가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첫째로 스털링 일가는 원래 물건을 집어 던지는 법이 없었다. 둘째로 벤저민 삼촌은 부유하고 자식도 없는 홀아비 노인이었고, 밸런시는 삼촌의 돈을 두려워하고 떠받들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삼촌의 비위를 거스르면 유언장에서 자기 이름이 빠질 것이었다—애당초 거기에 이름이 올라 있다면 말이지만. 밸런시는 벤저민 삼촌의 유언장에서 이름이 빠지고 싶지 않았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니 가난이 얼마나 속을 쓰리게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삼촌의 수수께끼를 견뎠고, 심지어 괴로움을 참으며 희미한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동풍처럼 거침없고 불쾌한 이저벨 아주머니는 어떤 식으로든 밸런시를 흠잡을 것이다—어떤 식인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이저벨 아주머니는 같은 흠을 두 번 잡는 법이 없었으니까—번번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 찔러댔다. 이저벨 아주머니는 제 생각을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남들이 자기네 생각을 아주머니에게 말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밸런시는 자기 생각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조지애나 아주머니는—고조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그 고조할머니는 조지 4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지난 소풍 이후로 죽은 친척과 친구들의 이름을 구슬프게 하나하나 읊으며 “다음에는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먼저 갈까?” 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숨 막히게 빈틈없는 밀드레드 아주머니는 밸런시에게 제 남편과 그 지긋지긋한 신동 아기들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견뎌 줄 사람은 밸런시 말고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글래디스 언니도 신경염의 고통을 세세히 늘어놓을 것이다. 스털링 일가의 엄격한 촌수 계산법에 따르면 실은 오촌인 글래디스 언니는 키 크고 마른 여자였고, 스스로 예민한 성정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스털링 일가 전체의 경탄을 한 몸에 받는 올리브는, 밸런시에게 없는 것—미모, 인기, 사랑—을 모두 갖춘 올리브는 제 미모를 뽐내고 인기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눈부셔하고 부러워하는 밸런시의 눈앞에서 사랑의 증표인 다이아몬드를 과시할 것이다.
오늘은 그런 일이 하나도 없을 터였다. 찻숟가락을 챙겨 넣을 일도 없었다. 뒷정리는 언제나 밸런시와 스티클스 아주머니의 몫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육 년 전에 웰링턴 아주머니가 결혼할 때 장만한 은 식기 세트에서 찻숟가락 하나가 없어졌다. 밸런시는 그 은제 찻숟가락 이야기를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그 은숟가락의 유령은 그 뒤로 집안 잔치 때마다 뱅코의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래, 밸런시는 소풍이 어떨지 훤히 알았고, 거기서 구해 준 비를 축복했다. 올해에는 소풍이 없을 것이다. 웰링턴 아주머니는 그 신성한 날에 맞추어 기념할 수 없다면 아예 기념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떤 신이 있든 그 점만은 감사할 일이었다.
소풍이 없을 테니, 오후에 비가 그치면 도서관에 가서 존 포스터의 다른 책 한 권을 빌려 오기로 마음먹었다. 밸런시는 소설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존 포스터의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자연에 관한 책”이었다—사서는 프레더릭 스털링 부인에게 “숲이나 새나 벌레, 그런 것들에 관한 책 있잖아요”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밸런시도 그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물론 못마땅해하는 소리는 따라붙었다. 그 책들을 지나치게 즐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지성을 닦고 신앙을 다지려고 책을 읽는 것은 허용되는 일이었고, 심지어 칭찬할 일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책은 위험했다. 밸런시는 제 교양이 높아지는지 어떤지는 몰랐다. 다만 여러 해 전에 존 포스터의 책을 만났더라면 삶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 책들은 이제는 문이 영영 닫혔지만 한때라면 자신도 들어갈 수 있었을 세상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듯했다. 존 포스터의 책이 디어우드 도서관에 들어온 것은 고작 지난 일 년 사이였다. 사서의 말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유명한 작가였다고 하지만.
“어디에 사는 분인가요?” 밸런시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아무도 몰라요. 책을 보면 캐나다 사람임이 틀림없는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출판사에서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거든요. 존 포스터는 아마 nom de plume일 거예요. 책들이 어찌나 인기인지 도서관에 붙어 있을 새가 없어요. 뭐가 그리 좋다고들 야단인지 저로서는 정말 모르겠지만요.”
“전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밸런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뭐—” 클라크슨 양은 깔보듯 웃어 보이며 밸런시의 의견을 없는 셈 쳤다. “저는 벌레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하지만 포스터는 확실히 벌레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모양이에요.”
밸런시도 벌레를 그리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몰랐다. 밸런시를 사로잡은 것은 야생 동물과 곤충의 삶에 대한 존 포스터의 신기하리만큼 해박한 지식이 아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좀처럼 설명할 수 없었다—끝내 밝혀지지 않는 어떤 신비의 감질나는 유혹—조금만 더 나아가면 커다란 비밀이 있으리라는 암시—잊힌 아름다운 것들의 희미하고 붙잡을 수 없는 메아리—존 포스터의 마법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포스터의 새 책을 빌려 와야겠다. 『엉겅퀴 수확』을 빌린 지 한 달이 지났으니 어머니도 설마 반대하지는 못하리라. 밸런시는 그 책을 네 번 읽었다—여러 대목을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심장 언저리에 생기는 그 이상한 통증을 트렌트 박사에게 보이러 갈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들었다. 최근 들어 통증이 제법 잦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세도 성가셔졌다. 가끔씩 찾아오는 어지럼증과 이상하게 숨이 차는 증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진찰을 받으러 갈 수 있을까? 더없이 대담한 생각이었다. 스털링 일가에서 가족회의를 열고 제임스 삼촌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의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다음에야 포트 로런스의 앰브로즈 마시 박사를 찾아갔다. 육촌 애들레이드 스털링과 결혼한 의사였다.
하지만 밸런시는 앰브로즈 마시 박사가 싫었다. 게다가 15마일 떨어진 포트 로런스에는 누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갈 수도 없었다. 심장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알려지는 날에는 엄청난 소동이 날 테고, 집안사람이란 사람은 다 찾아와 그 일을 의논하고 충고하고 주의를 주고 경고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매들이며 마흔 대나 떨어진 사촌들이 “꼭 그런 증세”를 보이다가 “아무 예고도 없이 덜컥 죽었단다, 얘야” 하는 끔찍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이저벨 아주머니는 자기가 늘 도스를 두고 심장에 탈이 날 것처럼 생긴 아이라고 했음을 기억해 낼 것이다—“늘 그렇게 얼굴이 홀쭉하고 파리하더니.” 웰링턴 삼촌은 “스털링 집안에서는 여태껏 심장병을 앓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하며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조지애나는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혼잣말로 “가엾고 소중한 꼬마 도스가 이 세상에 오래 못 있을 것 같아 걱정이에요” 하고 불길한 예언을 할 것이다. 글래디스 언니는 “아니, 내 심장은 몇 년째 그러고 있는데요” 하고, 자기 말고는 누구도 심장을 가질 권리가 없다는 말투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브—올리브는 그저 아름답고 우월하고 지긋지긋하게 건강해 보일 것이다. 마치 “내가 있는데 도스처럼 시들고 있으나 마나 한 애 때문에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라고 말하듯이.
밸런시는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심장에 심각한 이상은 전혀 없으리라고 거의 확신했고, 이야기를 꺼냈다간 벌어질 그 모든 소동은 필요 없는 일이었다. 바로 오늘 조용히 슬쩍 트렌트 박사에게 다녀오면 될 것이었다. 진료비야 아버지가 밸런시가 태어난 날 은행에 넣어 준 200달러가 있었다. 그 돈은 이자조차 손대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트렌트 박사에게 진료비를 낼 만큼만 몰래 찾아 쓸 생각이었다.
트렌트 박사는 무뚝뚝하고 말을 거침없이 하는 데다 정신이 딴 데 가 있곤 하는 노인이었지만, 심장병에 관해서는 인정받는 권위자였다. 비록 세상과 동떨어진 디어우드에서 일반 진료를 보는 의사에 불과했어도 그랬다. 트렌트 박사는 일흔이 넘었고 머지않아 은퇴할 생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십 년 전 글래디스 언니에게 신경염은 다 상상일 뿐이며 그걸 즐기고 있다고 말한 이래로 스털링 일가에서는 아무도 트렌트 박사를 찾지 않았다. 자기 오촌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더구나 스털링 일가는 모두 성공회 교회에 다니는데 박사는 장로교 신자였다. 하지만 집안에 대한 불충이라는 악마와 소동과 소란과 충고라는 깊은 바다 사이에 놓인 밸런시는, 악마 쪽에 한번 운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