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자
Frances Hodgson Burnett
제1장
정작 세드릭은 그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 누구도 세드릭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적조차 없었다. 아빠가 영국 사람이었다는 것은 세드릭의 엄마가 말해 주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세드릭이 너무 어렸기에,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몸집이 크고 눈이 파랗고 콧수염이 길었다는 것, 그리고 아빠 어깨에 올라타고 방 안을 돌아다니면 무척 신이 났다는 것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는 세드릭의 엄마에게 아빠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가 앓는 동안 세드릭은 다른 곳에 보내졌고, 돌아왔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세드릭의 어머니도 몹시 앓고 나서 이제 겨우 창가의 의자에 앉기 시작한 참이었다. 에롤 부인은 창백하고 야위어 있었고, 예쁜 얼굴에서는 보조개가 모두 사라졌다. 눈은 커다랗고 서글퍼 보였으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내 사랑,” 세드릭이 말했다(아빠가 늘 엄마를 그렇게 불렀기에 어린 세드릭도 그 말을 배웠다). “내 사랑, 우리 아빠는 좀 나아지셨어요?”
엄마의 팔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곱슬머리를 돌려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어린 무언가를 보고 있자니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 사랑,” 세드릭이 말했다. “아빠는 괜찮으세요?”
그때 갑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어린 마음에 두 팔로 엄마 목을 감싸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보드라운 뺨을 엄마 뺨에 꼭 붙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드릭이 그렇게 하자 에롤 부인은 아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었다. 다시는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꼭 끌어안은 채였다.
“그래, 아빠는 괜찮아.” 에롤 부인이 흐느꼈다. “정말, 정말 괜찮아. 하지만 우린—우린 이제 서로밖에 안 남았어. 아무도 없어.”
그렇게 어린 세드릭도 그제야 알았다. 몸집이 크고 잘생긴 젊은 아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듯이 아빠도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대체 무슨 이상한 일이 이토록 큰 슬픔을 불러왔는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세드릭의 엄마가 울었으므로, 세드릭은 엄마에게 아빠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혼자 마음먹었다. 또 엄마가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벽난로 불이나 창밖만 바라보도록 두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드릭과 세드릭의 엄마는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고, 남들이 보기에는 무척 외롭겠다 싶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좀 더 자라 어째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지 듣기 전까지는 그것이 외로운 생활인 줄 몰랐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와 결혼할 당시 세드릭의 엄마는 고아로 세상에 혼자뿐이었다. 아주 예뻤고, 어느 부유한 노부인의 말벗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노부인은 에롤 부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집에 들른 세드릭 에롤 대위는 속눈썹에 눈물이 맺힌 채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에롤 부인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순진하고 슬퍼 보여서 대위는 잊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있은 뒤,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깊이 사랑하여 결혼했다. 그 결혼으로 몇몇 사람의 미움을 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를 낸 사람은 영국에 사는 대위의 아버지였다. 아주 부유하고 지체 높은 늙은 귀족으로, 성미가 몹시 고약했고 미국과 미국 사람들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세드릭 대위 위로 두 아들이 더 있었는데, 법에 따라 그중 맏아들이 가문의 작위와 어마어마한 부와 위용을 자랑하는 영지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맏아들이 죽으면 그다음 아들이 상속인이 되었다. 그러니 세드릭 대위는 그토록 대단한 가문의 일원이면서도 정작 자신이 큰 부자가 될 가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연은 두 형에게 베풀지 않은 선물을 막내아들에게 주었다. 얼굴이 아름다웠고, 몸은 건장하고 보기 좋으면서도 우아했다. 웃음은 환했고 목소리는 다정하고 명랑했다. 용감하고 너그러웠으며 세상에서 가장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누구에게나 사랑받게 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두 형은 그렇지 않았다. 둘 다 잘생기지도, 그다지 착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았다. 소년 시절 이튼에 다닐 때도 인기가 없었고, 대학에 가서는 공부에 아무 관심 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진정한 친구도 거의 사귀지 못했다. 아버지인 노백작은 두 아들 때문에 끊임없이 실망하고 수모를 겪었다. 상속인이란 아들은 고귀한 가문의 이름을 빛내 주지 못했으며, 사내다운 기개도 고결한 품성도 없이 그저 이기적이고 낭비벽 심한 보잘것없는 인간밖에는 되지 못할 성싶었다. 고작 셋째여서 아주 적은 재산밖에 갖지 못할 아들이 온갖 재주와 매력과 힘과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다니, 노백작은 몹시 속이 쓰렸다. 위엄 있는 작위와 눈부신 영지에 마땅히 따라야 할 좋은 것들을 그 잘생긴 젊은 아들이 모두 지닌 듯해서, 때로는 미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늙고 거만하고 고집 센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막내아들을 몹시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심통이 난 끝에 막내아들을 미국 여행길에 보내 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두 형은 방탕한 행실로 아버지 속을 몹시 썩이고 있었는데, 막내아들을 끊임없이 형들과 견주어 보며 화내는 일이 없도록 잠시 떠나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섯 달쯤 지나자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남몰래 아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세드릭 대위에게 편지를 써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대위가 아버지에게 막 써 보낸 편지와 도중에 엇갈렸다. 대위의 편지에는 아름다운 미국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처녀와 결혼할 작정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받아 본 백작은 불같이 화를 냈다. 성미가 고약하기는 했지만, 평생 대위의 편지를 읽었을 때처럼 분노를 걷잡지 못한 적은 없었다. 편지가 왔을 때 방에 있던 전속 하인은 나리가 곧 졸중으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백작은 한 시간 동안 호랑이처럼 날뛰다가 자리에 앉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다시는 본가 근처에도 오지 말고 아버지나 형들에게 편지도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원하는 대로 살고 원하는 곳에서 죽으라면서, 가족과는 영원히 인연을 끊을 테니 평생 아버지의 도움은 바라지 말라고 했다.
편지를 읽은 대위는 몹시 슬펐다. 영국을 무척 좋아했고, 자신이 태어난 아름다운 집을 깊이 사랑했다. 성미 고약한 늙은 아버지까지도 사랑했으며, 아버지가 실망할 때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온정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을 해서 생계를 꾸리도록 자라 온 것도 아니고 사업 경험도 없었지만, 용기가 있었고 의지도 굳었다. 그래서 영국 육군의 장교직을 팔고, 어렵사리 뉴욕에서 일자리를 구한 뒤 결혼했다. 영국에서 살던 시절과는 생활이 크게 달라졌지만 대위는 젊고 행복했고, 열심히 일하면 앞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조용한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소박한 가운데 모든 것이 그토록 즐겁고 밝아서, 그저 에롤 부인이 사랑스럽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부유한 노부인의 아름다운 말벗과 결혼한 일을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에롤 부인은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었고, 어린 아들은 엄마와 아빠를 둘 다 닮았다. 그토록 조용하고 값싼 작은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보다 복 받은 아기는 일찍이 없었던 듯했다. 첫째로 늘 건강해서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았다. 둘째로 성미가 어찌나 순하고 하는 짓이 사랑스러운지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었다. 셋째로 생김새가 어찌나 예쁜지 꼭 그림 같았다. 세드릭은 머리숱 없이 태어나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드럽고 가느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풍성했는데, 처음에는 끝이 말리더니 여섯 달이 되었을 때는 느슨한 고리 모양으로 곱슬거렸다. 커다란 갈색 눈에 속눈썹이 길었고 작은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허리가 튼튼하고 다리가 아주 실해서 아홉 달이 되자 갑자기 걸음마를 배웠다. 아기치고는 예절도 어찌나 바른지, 만나 보면 누구나 즐거워했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친구로 여기는 듯했다. 거리에서 유모차에 타고 있을 때 누가 말을 걸면, 갈색 눈으로 그 낯선 사람에게 사랑스럽고도 진지한 눈길을 한 번 보낸 다음 예쁘고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세드릭이 사는 조용한 거리의 이웃 가운데는—세상에서 가장 심술궂은 사람으로 여겨지던 길모퉁이 식료품점 주인까지도—세드릭을 만나고 말을 건네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 달 한 달 지날수록 세드릭은 더 잘생겨지고 더 재미있는 아이가 되어 갔다.
보모와 함께 걸어서 외출할 만큼 자랐을 때, 세드릭은 작은 수레를 끌고 다녔다. 짧은 흰 킬트를 입고 금빛 곱슬머리 위에 커다란 흰 모자를 뒤로 젖혀 썼는데, 잘생기고 튼튼한 데다 얼굴까지 발그레해서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보모는 집에 돌아오면, 부인들이 마차를 세워 세드릭을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는 이야기며, 세드릭이 늘 알던 사이처럼 명랑하게 말을 건네자 얼마나들 기뻐했는지를 세드릭의 엄마에게 들려주곤 했다. 세드릭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렇게 명랑하고 겁 없이, 어딘가 깜찍한 태도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데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남을 잘 믿는 천성과, 누구에게나 마음을 쓰고 자신이 편안하기를 좋아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 하는 다정한 어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아주 빨리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런 마음은 늘 사랑이 넘치고 사려 깊고 다정하고 예의 바른 부모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더욱 자랐는지도 몰랐다. 집에서는 모질거나 무례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사랑과 귀여움을 받고 다정한 보살핌 속에서 지냈으니, 어린 영혼에는 친절함과 티 없이 따뜻한 마음이 가득했다. 세드릭의 엄마가 늘 예쁘고 다정한 애칭으로 불리는 것을 들었기에, 자신도 엄마에게 말할 때 그 애칭들을 썼다. 아빠가 엄마를 지켜 주고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늘 보았으므로, 자신도 엄마를 아끼고 보살피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세드릭의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보았을 때, 다정한 어린 마음속에는 엄마를 행복하게 해 드리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차츰 자리 잡았다. 아기 티를 겨우 벗어난 나이였지만, 엄마 무릎에 기어 올라가 입을 맞추고 곱슬머리를 엄마 목에 기댈 때마다 그 생각이 마음속에 있었다. 장난감과 그림책을 가져다 보여 줄 때도, 소파에 누운 엄마 곁에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스스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아, 메리!” 어느 날 세드릭은 에롤 부인이 오래 함께해 온 하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아이가 천진한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도와주려 애쓰는 게 틀림없어요—나는 알아요. 가끔은 나를 안쓰러워하는 듯, 다정하면서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다가와 나를 어루만져 주거나 뭔가를 보여 줘요. 그 조그만 게 어찌나 어른스러운지, 정말 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세드릭은 자라면서 하는 짓에 남다르고 귀여운 데가 많아, 사람들을 무척 재미있게 하고 관심을 끌었다. 세드릭의 어머니에게는 세드릭이 더없이 좋은 벗이어서 다른 벗은 거의 바라지 않았다. 둘은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놀곤 했다. 세드릭은 아주 어릴 때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 뒤로는 저녁이면 벽난로 앞 깔개에 엎드려 소리 내어 읽곤 했다. 이야기책을 읽을 때도 있었고 어른들이 읽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신문까지 읽었다. 그럴 때면 부엌에 있던 메리는 세드릭의 귀엽고 엉뚱한 말에 에롤 부인이 즐겁게 웃는 소리를 듣곤 했다.
“아니, 정말이지,” 메리가 식료품점 주인에게 말했다. “그 깜찍한 짓이며 어른스러운 말씨를 보면 누구라도 안 웃고 배기겠어요! 새 대통령 후보가 지명되던 날 밤에는 부엌으로 들어와 불 앞에 서지 않겠어요. 작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천진한 얼굴은 판사처럼 근엄해 가지고, 꼭 그림 같았지요. 그러더니 저더러 ‘메리,’ 하잖아요. ‘저는 선거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이러는 거예요. ‘저는 공화당 편이에요. 내 사랑도 그렇고요. 메리도 공화당 편이에요?’ ‘천만에요,’ 제가 그랬죠. ‘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민주당 편이에요!’ 그러자 도련님이 저를 올려다보는데, 마음이 찡해지는 눈으로 그러는 거예요. ‘메리,’ 하더니, ‘나라가 망하겠어요.’ 그날부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 정치 생각을 바꾸라고 저랑 실랑이를 벌인다니까요.”
메리는 세드릭을 무척 귀여워했고, 무척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세드릭이 태어났을 때부터 세드릭의 어머니와 함께 지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요리사며 하녀며 보모며 온갖 노릇을 도맡았다. 메리는 우아하고 튼튼한 작은 몸과 고운 몸가짐을 자랑스러워했고, 특히 이마 위에서 물결치고 어깨 위로는 길게 늘어진 곱슬머리가 탐스럽게 빛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세드릭의 엄마를 도와 작은 옷들을 짓고 손질하는 일이라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귀족 같다고요?” 메리는 말하곤 했다. “정말이지, 5번가에서 도련님만큼 잘생기고 걸음걸이까지 근사한 아이가 있으면 어디 한번 보고 싶네요. 부인께서 입던 낡은 드레스로 지은 조그만 검은 벨벳 치마를 입고 나서면 남자고 여자고 아이고 모두 돌아본다니까요. 작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곱슬머리를 반짝이며 휘날리고 가는데, 꼭 어린 귀족 같아요.”
세드릭은 자신이 어린 귀족처럼 보인다는 것을 몰랐다. 귀족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가장 친한 친구는 길모퉁이 식료품점 주인이었다—그 심술궂은 식료품점 주인은 세드릭에게는 한 번도 심술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 식료품점 주인은 홉스 씨였고, 세드릭은 홉스 씨를 무척 대단하게 여기고 존경했다. 가게에는 말린 자두며 무화과며 오렌지며 비스킷이 잔뜩 있었고 말과 짐마차까지 있었으니, 세드릭은 홉스 씨가 아주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유 배달부와 빵장수, 사과 장수 할머니도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홉스 씨를 가장 좋아했다. 둘은 몹시 친해서 세드릭은 날마다 찾아갔고, 함께 앉아 꽤 오랫동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많았다. 둘이 찾아내는 이야깃거리는 놀라울 만큼 많았다. 가령 7월 4일 독립기념일만 해도 그랬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끝이 없을 듯했다. 홉스 씨는 ‘영국인들’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고, 미국 독립 전쟁의 자초지종을 들려주면서 적이 얼마나 악랄했고 독립 전쟁의 영웅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 애국심이 넘치는 굉장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심지어 선심을 써서 독립선언서의 일부를 외워 들려주기까지 했다.
세드릭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눈이 반짝이고 뺨이 빨개졌으며, 곱슬머리는 온통 비벼지고 헝클어져 노란 대걸레 술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세드릭의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급해,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마 홉스 씨 덕분이었을 것이다. 홉스 씨는 신문 읽기를 좋아했으므로, 세드릭은 워싱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홉스 씨는 대통령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려 주곤 했다. 한번은 선거가 있었는데, 세드릭에게는 모든 것이 아주 거창하게 느껴졌다. 아마 홉스 씨와 세드릭이 없었다면 나라는 망했을지도 몰랐다.
홉스 씨는 세드릭을 데리고 커다란 횃불 행진을 보러 갔다. 횃불을 들고 행진했던 많은 사람은 나중에도 가로등 기둥 곁에 서 있던 뚱뚱한 남자를 기억했다. 어깨 위에 잘생긴 꼬마를 태우고 있었는데, 꼬마는 모자를 허공에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삶을 그토록 놀랍게 바꾸어 놓은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세드릭은 일곱 살이 넘었고 아직 여덟 살은 되지 않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세드릭은 홉스 씨와 영국과 여왕 이야기를 나누었고, 홉스 씨는 귀족들을 몹시 호되게 비난했는데 특히 백작과 후작들에게 분개했다. 그날 아침은 더웠다. 세드릭은 친구 몇 명과 병정놀이를 하고 난 뒤 쉬려고 가게로 들어갔다. 홉스 씨는 궁정의 어떤 의식을 그린 그림이 실린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한 장을 들여다보며 몹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흥,” 홉스 씨가 말했다. “지금은 저렇게들 해 대지. 하지만 언젠가 저놈들한테 짓밟힌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놈들을 하늘 높이 날려 버리면, 단단히 혼쭐이 날 거야—백작이고 후작이고 모조리! 그날이 오고 있으니, 각오들 하라지!”
세드릭은 여느 때처럼 높은 걸상에 올라앉아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홉스 씨를 향한 은근한 찬사의 표시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홉스 씨는 후작들을 많이 알고 지내셨어요?” 세드릭이 물었다. “백작들은요?”
“아니,” 홉스 씨가 분개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니. 그런 놈 하나라도 여기 들어와 내 눈에 띄기만 해 보라지. 그 말이면 됐어! 탐욕스러운 폭군들이 내 크래커 통들에 둘러앉아 있는 꼴은 못 봐!”
홉스 씨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 어찌나 자랑스러웠는지, 자랑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 사람들도 뭘 좀 더 알았다면 백작은 안 됐을지 몰라요.” 세드릭은 그 사람들의 딱한 처지가 어쩐지 가엾어져서 말했다.
“안 됐을 거라고!” 홉스 씨가 말했다. “그걸 아주 자랑으로 아는걸! 뼛속부터 그런 놈들이야. 못된 족속이야.”
한창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메리가 나타났다.
세드릭은 메리가 설탕이라도 사러 온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굴이 창백하다 싶게 보였고, 무슨 일로 흥분한 듯했다.
“우리 세드릭 도련님, 집에 가요.” 메리가 말했다. “부인께서 도련님을 찾으세요.”
세드릭은 걸상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엄마가 저랑 같이 나가시려는 거예요, 메리?” 세드릭이 물었다. “안녕히 계세요, 홉스 씨. 또 올게요.”
세드릭은 메리가 얼빠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왜 자꾸 고개를 젓는지도 궁금했다.
“무슨 일이에요, 메리?” 세드릭이 말했다. “날씨가 더워서 그래요?”
“아니에요.” 메리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한테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있어요.”
“햇볕 때문에 내 사랑이 머리가 아프신 거예요?” 세드릭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쿠페 마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작은 응접실에서는 누군가 세드릭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메리는 세드릭을 서둘러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제일 좋은 크림색 플란넬 여름옷을 입히고, 허리에 빨간 띠를 두른 다음 곱슬머리를 빗어 주었다.
“귀족이라고요?” 메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이니 지주 양반들이니. 에이, 몹쓸 것들! 귀족이라니—참 운도 없지.”
정말 알쏭달쏭한 일이었지만, 세드릭의 엄마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흥분하는지 알려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메리가 한탄을 늘어놓도록 내버려 두고 별로 캐묻지 않았다. 옷을 다 입자 세드릭은 아래층으로 달려가 응접실로 들어갔다. 날카로운 인상의 키 크고 마른 노신사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드릭의 어머니는 그 곁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고,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세디!” 에롤 부인이 소리쳤다. 어린 아들에게 달려와 두 팔로 끌어안고는 두렵고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맞추었다. “아! 세디, 우리 아가!”
키 큰 노신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을 바라보며 앙상한 손으로 여윈 턱을 문질렀다.
못마땅해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까,” 마침내 노신사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이분이 어린 폰틀로이 경이십니다.”




